海垣, 이경국 (칼럼니스트)길을 걷다가 우체통을 발견하면 정인(情人)을 본 듯 반갑기 짝이 없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여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종이신문이나 우체통이 해당된다.
소싯적에 우체국을 정부의 부처 가운데 가장 반기었다. 아버지께서 우체국에 근무하신 영향도 있지만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무진 많이 이용해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기와 편지는 글쓰기에 영향을 끼쳐 지금까지 왕성하게 글을 쓰면서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무료할 시간이 아예 없다. 글을 쓰는 시간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우체통은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군에 있는 사람과 펜팔을 할 때 많이 이용했다. 부음은 직접 전달했지만 우체부의 일이기도 했다.
방학기간에 편지를 많이 썼으니 기억에 새롭다. 거의 매일 쓰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깨끗하고 정갈하게 편지를 써서 봉투에 주소를 쓴다. 우표는 침을 발라서 붙혔는데 버릇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풀로 봉하면 편지는 그미의 몫이 된다. 학창시절 우리집에도 다녀갔으니 가족들이 다 아는 사이였던 그미였다.
해질녘에 우체부는 빨간색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 왔다. 아예 마루에 걸터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편지를 받고 보낼 편지를 주면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진다. 어쩌다 편지가 없는 날은 허전함이 허공을 찌르곤 했다.
그미는 이제 남의 아내가 되어 초로(初老)의 모습으로 머리에는 배꽃이 내렸을 것이다. 카톡 만능시대에 지금은 소식조차 두절 상태니 '인연이 무섭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나중에 알았는데 막내 동생에게 책을 자주 보내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연락이 된다면 추억을 회상(回想)하면서 쓸 글이 태산같이 많은데 아쉽기 짝이 없다.
필자는 청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를 좋아했다.
청마는 통영여중 재직 당시 가사 교사로 부임한 시인 이영도를 보고 첫눈에 반해 20년 동안 연애편지를 써 보냈다. 처음 만난 1947년부터 교통사고로 사망한 1967년까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고통과 회한, 설렘과 기쁨을 담아 보낸 연애편지들.
이영도도 마음을 열었다. 보낸 글의 제목이 <무제>였다. 어떠한 제목도 부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청마가 유부남이었다는 점이다. 반면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외동딸을 키우던 과부였다. 두 사람은 현실의 만남(불륜)은 갖지 않았다고 한다.
이영도는 청마가 보낸 편지 5천여 통 중 200통을 추려 유치환 사망 두 달 후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당시로는 기록적인 2만5천 부를 찍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영도는 책의 판매수익을 모두 기부했다고 한다.
청마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시내버스에 치여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영도를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걷다가 당한 사고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당시 이영도의 아픈 가슴을 생각하노라면 내 가슴이 아리다.
대구에서 근무할 무렵 앞 산에 있는 시조 시인 이호우의 시비에 자주 갔었다. 이영도의 오빠다. 청마문학관은 통영에 있다. 꼭 한번 찾아 볼 생각이다.
사랑에는 불륜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무엇이 정륜이란 말인가? 원시 시절에 인간은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었다. 딴 말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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